최근 화제인 데블스플랜2에 출연한 이세돌을 보며 바둑에 대한 흥미가 다시 생겼다.
2016년 3월, 세상은 ‘인공지능’이라는 단어 앞에 숨을 멈췄다.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 대표 이세돌 9단과 벌인 바둑 대결은 단순한 게임을 넘어선 하나의 문명이었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힘에 경탄하면서도, 4국에서 이세돌이 단 한 수로 알파고를 흔들며 승리를 거두던 순간, 어떤 감정을 공유했다. “인간은 아직 지지 않았다”는 안도, 그리고 무엇보다 바둑이라는 고요한 게임에 담긴 무한한 사고력과 창의성에 대한 경의였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지만, 바둑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화려한 미디어의 조명은 사라졌지만, 바둑판 위에는 여전히 진지한 눈빛과 고요한 긴장감이 흐른다. 특히 동네 공원이나 바둑 카페 한편에서는, 세상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매일같이 바둑판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은퇴 후의 삶을 ‘한 수’의 즐거움으로 채우는 시니어 바둑인들이다.
이들은 말이 없다. 대신 돌을 놓는다. 눈빛을 주고받고, 깊게 생각하며, 바둑판 위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어떤 이는 그곳에서 친구를 만나고, 또 어떤 이는 스스로와의 침묵 속에서 삶을 정리한다. 이들의 바둑은 승부를 넘어서, 삶의 방식이다. 이세돌이 남긴 그 한 수처럼, 그들 역시 인생의 중반 이후에도 '생각하고, 두고, 기다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번 글에서는 이 고요한 승부의 세계, 시니어 바둑 동호회라는 작은 공동체를 따라가 본다. 그들의 바둑판엔 단지 흑과 백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이 든다는 것, 함께 산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배우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바둑이 있는 풍경: 공원과 바둑 카페에서 피어나는 일상의 온기
서울의 아침, 사람들이 분주히 지하철로 향하는 시간에도 어떤 이들은 천천히 집을 나선다. 그들의 목적지는 독특하다. 바로 동네 공원, 혹은 조용한 바둑 카페다. 은퇴 후 바쁜 일상에서 벗어난 이들이 선택한 건 여유로운 ‘한 수’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바둑판을 펴고 돌을 올려놓는 손놀림은 마치 오랜 의식처럼 느껴진다. 도심 공원에 마련된 야외 바둑판은 일종의 커뮤니티 공간이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이미 서로의 수법을 알고, 말없이도 대국이 진행된다. 인사 한 마디 없이도 돌을 놓고 나면, 둘 사이에 깊은 교감이 오간다. 바둑판 위에서는 말보다 수가 먼저다.
한편 바둑 카페는 또 다른 세상이다. 커피향과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진 공간에서 이들은 하루의 중심을 바둑에 둔다. 일부 카페는 매월 소규모 대회를 열기도 한다. 우승 상품은 소박하지만 참가자들의 눈빛은 진지하다. 이 공간에서의 바둑은 단순한 게임이 아닌 '삶의 철학'이다. 한 수 한 수에 인생의 판단과 기다림, 그리고 후회를 담는다. 시니어들이 공원과 카페에서 바둑을 두는 풍경은 단지 취미 생활을 넘어서, 사회적 연결망이 약해지는 은퇴 이후의 삶에서 관계를 회복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더불어 바둑이라는 공통의 언어는 세대를 넘나드는 소통 수단이 되어주기도 한다. 실제로 몇몇 카페에서는 중장년층과 청년들이 함께 두는 '교류의 장'도 운영된다. 손주에게 바둑을 가르쳐주듯, 젊은이들에게 수를 알려주는 모습은 마치 오래된 문화가 다시 살아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인생이 바둑이라면 지금은 중반전” – 시니어들이 말하는 바둑의 의미
시니어 바둑 동호인들에게 바둑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선다. 그들에게 바둑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인생의 축소판이다. "초반에 욕심부리면 안 돼. 끝에 가서 다 무너져"라는 말은 대국 중에 자주 들을 수 있는 조언이자, 인생 전체를 반영한 철학이다. 실제로 동호인들 사이에서 바둑은 ‘묵상하는 취미’로 통한다. 급하게 두는 사람은 실수를 한다. 생각 없이 두면 판세를 놓친다. 이런 특성 때문에 바둑은 시니어들에게 더없이 잘 맞는 활동이다. 젊을 때처럼 빠르게 결과를 내기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인생의 흐름을 읽으며 살아가는 지금의 자세와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응한 한 70대 회원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엔 회사에서 눈치 보고 바쁘게 살았는데, 지금은 매일 여기 와서 바둑 한 판 두고 집에 가면 마음이 정리돼. 누구랑 말 안 해도 괜찮아. 이게 묵언수행이지 뭐.” 이런 표현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실제로 바둑판 앞에서는 침묵이 일상이며, 그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 과정에서 감정이 가라앉고, 삶의 균형이 잡힌다고 말한다. 바둑은 경쟁이긴 하지만, 상대를 이기기 위한 ‘파괴’보다는 상대와 조화를 이루며 판을 완성하는 게임이다. 그래서 노년의 바둑은 전투가 아니라 예술에 가깝다는 평가도 나온다.
또한, 이들은 바둑을 통해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은퇴 이후 단절되기 쉬운 사회적 네트워크를, 바둑을 통해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매일 얼굴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몰라요. 말은 안 해도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요.”라는 말은 바둑 동호회가 단순한 모임을 넘어선 공동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바둑은 그들에게 생각의 시간, 정서적 안정, 사회적 연대감을 제공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존재다. 그 점에서 바둑은 시니어들에게 여전히 ‘진행 중인 삶’의 중요한 일부다.
조용한 전통, 미래로 전해지다 – 바둑 문화의 지속 가능성과 세대 간 연결
바둑은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적인 게임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시니어층의 활발한 참여는 바둑 문화의 근간을 유지시키는 원동력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전통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선 세대 간의 연결이 필수적이다. 많은 바둑 동호회에서는 청소년이나 청년을 위한 무료 강좌를 열거나, 가족 바둑 대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바둑의 대중화를 시도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디지털 게임에 익숙하지만, 바둑의 ‘생각의 깊이’와 ‘판단력 향상’ 요소가 교육적으로 유익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다시금 관심을 갖는 움직임도 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유튜브나 인터넷 방송을 통해 바둑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으며, AI 바둑 프로그램과의 대국을 통해 새로운 재미를 찾는 젊은층도 생겨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디지털 확산의 이면에는 시니어 세대의 전통적 바둑 감각이 여전히 핵심 자산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젊은 바둑 유튜버들이 노장 바둑 고수와 콜라보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인터뷰 형식으로 시니어 플레이어들의 철학을 소개하는 등 ‘세대 간 협업’ 형태도 점차 늘고 있다.
시니어 바둑 동호회는 단순한 취미 공간을 넘어서, 바둑이라는 문화유산을 미래 세대에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특히 지역 기반의 동호회들은 그 지역 내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재능기부 활동이나, 지역 행사를 통한 바둑 홍보에도 적극적이다. 이는 바둑이 단절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전통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다. 조용한 게임, 느린 게임이지만 바둑은 여전히 오늘을 살고 있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바둑판 위의 침묵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전통이 현대와 이어지는 소리 없는 다리이기도 하다.
마무리
바둑판 위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서두를 것도, 과시할 것도 없다. 돌 하나를 두기 위해 오래 고민하고, 때로는 한 수의 실수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그들의 자세는 인생을 대하는 태도와 닮아 있다. 공원 벤치에 앉아 흑돌과 백돌을 마주하는 그들의 모습은 단순한 취미 생활을 넘어선 어떤 철학의 경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경쟁 대신 사유의 여유를 배우고, 또 누군가는 그 안에서 다시 삶의 균형을 찾아간다. 바둑은 말이 없지만, 그 침묵 속에는 세월을 견뎌온 사람들만이 지닌 깊이가 담겨 있다. 어쩌면 우리가 잊고 지낸 ‘생각하는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승패를 넘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이들의 바둑판은 작지만 넓다. 그리고 그 조용한 한 수, 한 수는 우리 모두에게도 닿을 수 있는 삶의 은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