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푸드의 진화: 김치에서 떡볶이, 그리고 김부각까지
해외 여행 중 낯선 도시의 대형마트를 찾는 재미는 각별하다. 관광지보다 더 생활 밀착형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 마트들에서 ‘낯설지 않은 것들’을 마주하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한국 음식, 이른바 K-푸드의 흔적이다.
예전에는 김치와 라면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프랑스 파리의 까르푸, 일본 도쿄의 돈키호테, 태국 방콕의 빅씨(Big C),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월마트까지—김치뿐 아니라 떡볶이, 김부각, 한국식 즉석죽, 고추장 마요네즈 같은 제품이 당당히 진열돼 있다.
이처럼 생활문화 전반의 침투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마트라는 공간은 이러한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인 장소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제품 구성의 다양화다. 예전에는 수출을 염두에 둔 몇몇 대기업 제품만 진열되었지만, 지금은 지역 소상공인의 브랜드나 한글 패키지를 그대로 유지한 마이너 브랜드까지 자리 잡고 있다. 심지어 어떤 매장에서는 비건 김치, 트러플 떡볶이처럼 ‘현지 취향과 결합한’ K-푸드 퓨전 상품도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한국산 김치도 과거의 비닐포장 제품이 아닌, 고급 유리병에 담긴 ‘프리미엄 김치’로 리뉴얼되어 판매된다. 깔끔한 패키지와 함께 ‘발효 푸드’로서의 건강 이미지까지 덧붙여 마케팅되며, 건강식품 코너에서 자리 잡은 모습도 눈에 띈다. 된장, 고추장, 고춧가루 역시 현지화된 레시피와 소용량 버전으로 등장하면서 주류 소비층을 타깃으로 확산되고 있다.
K-푸드가 단순한 이국적 음식이 아니라, 일상 소비재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신호다. 냉동 떡볶이는 집들이 음식으로, 비빔면은 한여름 해변 간식으로, 컵밥은 학생들의 점심으로 점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 이런 모습은 단순한 인기 차원을 넘어, 한국의 음식문화가 다른 국가의 식생활 안에 실질적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마트 속 화장품 코너, K-뷰티의 기지로
K-푸드가 식품 코너에 있다면, 비식품 코너에는 K-뷰티가 있다. 놀랍게도 해외 대형마트의 화장품 코너에 들어가 보면 종종 한국 브랜드가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단순히 ‘동양 화장품’ 코너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 라인으로 적극 진열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가장 인상적인 변화는 비(非)식품군 한류 상품의 등장이다. 최근 여러 마트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는 바로 K-뷰티 브랜드다. 한국 화장품은 더 이상 면세점이나 전문 매장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고급 브랜드가 아니다. 현지 마트의 화장품 진열대에도 클리오, 미샤, 이니스프리, 닥터자르트 같은 브랜드들이 줄줄이 입점해 있다.
이 제품들은 단순히 기능적 효용성만이 아닌, 패키지 디자인과 브랜드 이미지로 현지 고객을 사로잡는다. 예컨대 ‘한방’ 콘셉트를 내세운 마스크팩, ‘K-팝 아이돌 협업 리미티드 에디션’ 립스틱 등은 독특한 스토리와 감성으로 소비자를 끌어당긴다.
흥미로운 것은 마트에서 BTS나 뉴진스 등 K-팝 아이돌의 굿즈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일본 도쿄의 한 대형 마트에서는 방탄소년단 테마의 스낵, 쿠키, 음료, 스티커 세트가 한정판으로 출시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음악과 식품, 뷰티가 하나의 묶음처럼 팔리는 현상은 한류의 ‘융합형 소비’가 얼마나 깊게 자리잡았는지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 한국 드라마나 예능의 인기에 힘입어 등장한 K-주방용품, K-인스턴트 커피, K-플레이팅 도구까지, 한류는 이제 일상의 거의 모든 소비 분야에 녹아들고 있다.
태국에서는 ‘라네즈’, ‘이니스프리’, ‘미샤’ 같은 브랜드가 대형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미국의 타겟(Target)이나 CVS 같은 드럭스토어 체인에서도 ‘코스알엑스(COSRX)’, ‘썸바이미’, ‘토리든’ 등이 등장한다. 특히 마스크팩은 유럽에서도 인기를 끌며 마트 안의 미용상품군에서 빠지지 않는 아이템이 됐다.
흥미로운 점은 K-뷰티가 단지 품질이나 가격 경쟁력을 통해서만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한국식 미용 루틴—예컨대 ‘10단계 스킨케어’나 ‘수분-광채 피부 관리’ 방식 자체가 트렌드로 소비된다는 것이다. 마트에서 “Korean skincare”라는 안내 문구를 정식으로 붙여 놓는 브랜드도 이제는 드물지 않다.
또 하나 인상 깊은 점은, 제품의 설명 문구나 패키지에 한글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전 같으면 로컬 언어로 번역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한글이 ‘정체성’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다. 한국어의 낯섦이 오히려 ‘진짜 한국 것’이라는 신뢰를 주는, 흥미로운 역전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BTS와 블랙핑크, 굿즈로 진열대에 서다
마트에서 만나는 또 다른 한류의 형식은 바로 K-팝이다. 콘서트장이나 굿즈샵이 아닌, 평범한 마트에서도 BTS, 블랙핑크, 세븐틴, 보이넥스트도어 같은 아티스트의 얼굴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 매체는 다양하다—시리얼 패키지, 음료수 캔, 젤리 봉투, 심지어 위생용품 패키지까지.
미국 마트에서는 BTS와 협업한 ‘버터 쿠키’나 ‘콜드브루 커피’가 진열된 적이 있으며, 일본에서는 블랙핑크가 그려진 바디워시, 캐나다에서는 세븐틴 테마의 음료가 마트 한가운데를 차지한 사례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콜라보 상품들이 단순한 팬덤 대상이 아니라, 현지 일반 소비자도 구매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유명 아티스트가 모델인 제품은 ‘스타 마케팅’의 힘으로, 특정 연령대나 팬층을 넘어 폭넓게 팔린다. 그 결과, 아티스트의 이미지가 단지 문화 상품이 아니라 생활 제품에 접목되며 일상의 일부로 스며들게 된다.
이제 K-팝은 더 이상 무대 위에서만 소비되지 않는다. 마트 안에서, 냉장고 속에서, 혹은 화장실 선반 위에서 반복적으로 노출되며 대중의 머릿속에 박히는 브랜드가 되었다. 이는 문화 소비가 상품 소비와 맞물리며 만들어내는 일상 속 한류의 한 단면이다.
식품 한류는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범위지만, 최근 마트에서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는 건 비식품 한류의 존재감이다. K-팝, K-뷰티, K-헬스케어 제품들이 마트 한복판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들은 단순한 ‘한국 브랜드’가 아닌, 문화적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다.
먼저 K-뷰티의 마트 진입은 꽤 본격적이다. 일본 도큐핸즈나 돈키호테뿐 아니라, 프랑스의 까르푸, 미국의 타겟(Target)이나 월마트(Walmart)에서도 마스크팩, 쿠션 파운데이션, 톤업 크림, 립틴트 같은 한국 뷰티 제품들이 진열돼 있다. 이들은 단순히 ‘기능이 좋은 화장품’이라기보다는, 가성비 좋고 감각적인 디자인과 함께 ‘한류 팬심’을 자극하는 아이템으로 각광받는다.
예컨대 미국 월마트에서는 ‘Dr.Jart+’의 시카 페어 크림이 “Korean skin secret”이라는 문구와 함께 별도 진열되고, 프랑스의 마트에서는 라네즈의 수분 크림이 한국 아이돌 화보와 함께 프로모션되기도 한다. 태국이나 말레이시아에서는 미샤, 이니스프리, 토니모리 같은 브랜드가 한류 드라마 속 장면을 패키지에 삽입하거나, 배우와 협업한 디자인 에디션을 출시해 매대를 장악한다.
K-팝 굿즈도 예외는 아니다. BTS, 블랙핑크, 세븐틴 등의 영향력은 이미 음악 산업을 넘어 소비재 시장까지 진출했다. 일본의 이온마트에서는 BTS 캐릭터 ‘BT21’이 그려진 스낵과 음료, 마스크팩, 문구류가 독립 코너로 마련되어 있으며, 캐나다나 싱가포르에서는 블랙핑크가 홍보 모델로 나선 페리페라 제품이 인기 상품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아이돌 포토카드가 동봉된 음료나 간식도 흔히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 대형 마트에서는 특정 금액 이상을 구매하면 뉴진스 포토카드를 제공하는 이벤트가 펼쳐졌고, 필리핀에서는 K-팝 팬을 위한 “K-Fan Zone”이라는 별도 존이 마련되기도 했다. 이 구역에서는 아이돌 콘셉트에 맞춘 스낵, 젤리, 음료, 스티커가 결합된 패키지형 상품이 한정 판매된다.
뿐만 아니라 K-드라마의 인기로 인해 한국식 주방 도구나 테이블웨어도 한류 제품으로서 자리 잡았다. 예를 들어, 한국식 스테인리스 수저 세트, 김밥 말이 매트, 전자레인지용 라면 용기 등이 미국과 동남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K-드라마 속 주인공이 사용하는 물건을 그대로 구매하려는 팬들의 니즈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에는 건강과 라이프스타일의 결합을 표방한 제품도 등장하고 있다. ‘홍삼 젤리’, ‘헬시 곤약 젤리’, ‘다이어트 음료’ 같은 건강 간식류가 “K-슬리밍 식품”이라는 이름으로 유럽 마트에 진출한 사례도 있다. 이는 단순히 제품 수출이 아닌, K-헬스 트렌드의 확산이라는 새로운 흐름이다.
이처럼 한류는 식품의 경계를 넘어, 뷰티, 음악, 일상소비재, 건강 아이템까지 침투하고 있다. 마트는 단지 판매처가 아니라, 한류를 일상에서 경험하는 실질적인 공간이자, 팬덤이 일상 소비로 전환되는 ‘문화 교차점’이 된 셈이다.
마무리하며: 마트=새로운 한류의 현장
예전에는 관광명소나 대형 서점, 혹은 공연장에서야 한류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현지인의 일상이 펼쳐지는 슈퍼마켓에서도 한국의 문화는 소비되고 있다. 음식을 통해, 화장품을 통해, 그리고 스타의 이미지와 함께.
‘마트에서 만난 한류’는 가장 생활적인 공간 속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스며든 한국 문화의 흔적들이다. 이러한 관찰은 단순한 여행의 재미를 넘어, 한국이 ‘문화 수출국’으로서 얼마나 다층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한다. 마트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소비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의 교차점이자, 글로벌 라이프스타일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